韓国の捏造された歴史により日本統治時代を悪とする代表的な例は「慰安婦」や「徴用工」などが有名ですが、韓国メディアの報道を見ていると、これ以外にもしばしば反日を煽動する記事を目にします。
その一つのキーワードは「民族精気」(민족정기:ミンチョクチョンギ)です。
例えば、2017年8月15日の「光復節」の文在寅大統領の演説にはこのような一節がありました。(訳は『The New Stance』より借用)
尊敬する独立有功者の遺家族の皆さん、
慶尚北道安東に「臨清閣」という由緒ある家があります。
臨清閣は日帝による強制占領期に全財産を処分し満州へと亡命し、新興武官学校を建て、武装独立運動の土台を作った石洲・李相龍(イ・サンリョン)先生の本家です。9人もの独立闘士を輩出した独立運動の産室であり、韓国のノブレス・オブリージュを象徴する空間です。
彼に対する報復で日帝はその家を貫通するように鐡道を敷きました。99の部屋を持つ大邸宅であった臨清閣は今も半分になったままの姿です。
李相龍先生の孫息子、孫娘は解放後の韓国では孤児院で暮らしもしました。臨清閣の姿がまさしく、私たちが振り返るべき大韓民国の現実です。
日帝と親日の残滓をきちんと清算できずに民族の精気を正せませんでした。
ここで話題になっている「臨清閣」は下の建造物で、すぐ脇に鉄道が走っており、駅(安東駅-既に廃駅)は画像の手前に1kmほど進んだ所にあります。
この路線は「中央線」と呼び、鉄道の高速化を目的に安東駅を西に移転するのに伴い、「日本人が壊した臨清閣を元の姿に復元して、民族精気を立て直す」というのが、引用した演説の趣旨です。
この「民族精気」は韓国人でも上手く説明ができないそうですが、風水と結びついたナショナリズムで、「感情」に属するもののようです。
日本人が壊した民族精気を立て直すために過去に韓国政府が具体的にやったことが、「鉄杭」撤去(日帝が『地脈(龍脈)』を断ち切るために打ち込んだ鉄杭の撤去)とか、「朝鮮総督府」の建物の破壊です。〔共に金泳三(キム・ヨンサム)政権時〕
「鉄杭神話」は『反日種族主義』にも書かれています。
民間の迷信は日本にも「~は縁起が悪い」という類いのものがあるので、龍脈だの風水だのはいいのですが、これを韓国は政府レベルで “日帝の悪行” と結びつけ、大統領が演説で言及したり、韓国メディアが未だにそれを煽る記事を書くのは問題があり、これを韓国人が容易く信じてしまうとしたら非常に未開です。〔Wikipedia『日帝風水謀略説』〕
最近も、韓国の『毎日新聞』が5月3日付けで『[単独]安東臨清閣前の鉄路撤去現場に「日帝鉄杭」?』という記事を書きました。(原文:[단독] 안동 임청각 앞 철로 철거현장에 '일제 쇠말뚝'?→カイカイ反応通信:独立運動家の聖地から日帝鉄杭発見?=韓国の反応)
さて、問題の「臨清閣」ですが、文在寅の演説の後、朝鮮日報の週刊誌『週間朝鮮』がその誤解を解く記事(2017.10.02)を書いています。
『일제는 고의로 임청각을 훼손했나?』(機械翻訳:日帝は故意に臨清閣を毀損したのか?)というもので、長い記事なので、先に簡単に結論を書いておきます。
記事を読んでも土地勘がないのでピンと来ないのですが、要するに、先(1931年)に慶北線の終点である安東駅があり、その約10年後(1942年)に中央線と繋げるためには、当時はこの川沿いの路線が現実的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鉄道絡みで似たような話を紹介すると、京釜線の廃トンネルの入り口に刻まれている「嶽神驚奔」(山の神が驚いて逃げた)という文字は、当時、駐韓公使であった「林権助」の言葉ですが、これを「日帝強制占領期間に韓国人の信仰と文化をばかにした歴史」だと報じる記事が最近ありました。
実際に、迷信深い朝鮮人をなだめすかしてなんとか工事を完成させた京釜鉄道の人が林権助の所に来て、記念に何か字を書いて下さいと頼むので書いたのが「嶽神驚奔」だそうです。〔岩井尊人『林権助述 わが七十年を語る(1935)』の第44話「京釜鉄道が『嶽神驚奔』させる話」〕
ただそれだけの話なのですが、韓国メディアは悪意を持ってねじ曲げた記事にするわ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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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事の内、解説部分だけ引用して翻訳します。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04/2017090401583.html
しかし、1942年の中央線開通より約10年前に入った安東(アンドン)駅の位置と近隣地域の等高線が表示された地形図を確認してみると、中央線の線路は嶺南(ヨンナム)山を背にして洛東江(ナクトンガン=川)沿いの臨清閣(イムチョンガク)経由が不可避だったという指摘だ。 いわゆる「民族精気毀損論」を主張する人は「国道5号線が敷かれたコースに沿って安東南後面から安東大橋を渡り、北後面を通れば栄州に接近する移動距離を減らすことができた」と主張するが、この場合、当時この一帯で最も大きな町であり慶尚北道線鉄道の終点である安東駅を経由できないという致命的弱点がある。
安東に初めて鉄馬が入ってきたのは、中央線開通10年前の1931年、慶北線の占村(チョムチョン)~安東(アンドン)区間の開通と共にだ。 安東は朝鮮時代まで「安東大都護府」と呼ばれ、権門世族が多く住んだ大きな村であった。 朝鮮総督府は1913年にすでに京釜線の鉄路が通過する慶尚北道·金泉から尚州~占村(ムンチョン(聞慶)~醴泉~安東をつなぐ鉄道を開設する計画を立てていた。 「朝鮮鉄道」という私鉄会社は鉄道敷設免許を取得し、朝鮮総督府が1913年にすでに告示した路線に従って118キロの慶北線線路を敷いた。 安東邑城の南門の外に「慶北安東駅」という名の鉄道駅を開設した。 安東大都護府があった今の安東市内のウンブ公園(旧安東郡庁跡)から直線で300mほど離れたところに位置した鉄道駅だった。 あえて'安東駅'の前に'慶北'という名前を付けたのは'満鉄'(南満州鉄道株式会社)がすでに運営中だった'安東駅'(今の中国丹東駅)があったからだ。
問題になる中央線の鉄路が臨清閣(イムチョンガク)の前を通るようになったのは、安東に鉄道が敷かれてから10年余り経った1942年のことだ。 後日、満鉄総裁を務めた朝鮮総督府鉄道局長の大村卓一氏が立案した「朝鮮鉄道12ヵ年計画」に基づいて、京釜線·京義線に続く「第2韓半島縦貫鉄道計画」を立てながらだ。 こうした計画により1935年慶尚北道慶州から永川~義城~安東~栄州~堤川~原州~楊平を経て清凉里(チョンニャンニ、東京城域)に至る路線が確定した。 翌年の1936年に着工した中央線は、1942年に「京慶線」という名で開通した。 京城と慶州をつなぐという意味だ。
当時、中央線の鉄路を開設する時は、1937年の日中戦争の勃発で物資が不足していた時だ。 既存の線路を最大限利用しながら需要を確保することが不可避だった。 慶北北部最大の都市であり、当時までも慶北線の終点だった安東駅経由は当たり前だった。 現在は中央線·慶北線·嶺東線の3つの鉄路が交差する栄州駅が慶北北部鉄道交通の中心だが、当時は安東駅が鉄道交通の要地だった。 慶北線の終点が安東駅から栄州(ヨンジュ)駅に変更されたのは、朴正煕大統領時代の1966年、慶北線と嶺東線を栄州から直結させてからだ。 現在、栄州にある韓国鉄道公社慶北本部の前身である鉄道局は、1964年まで安東駅にあった。
すでに開設された安東駅を基点に鉄道が栄州に北上する場合、洛東江の堤防に沿って遡るが、安東の裏山である嶺南山の渓谷に沿って栄州に接近することは避けられない。 河川の堤防上に鉄道を敷設することは、日帝時代によく使われた方法だ。 鉄道開設と土地収用による民家被害を最小限に抑えることができ、鉄道開設とともに河川堤防を補強して夏の洪水に備えることができる様々な長所がある。 京釜線も密陽江(ミルヤンガン)と洛東江(ナクトンガン)堤防に沿って釜山に向かう。 ソウルでも京ウォン線(現·京義中央線に編入)の鉄路が漢陽(ハンヤン)都城を避けて漢江と中浪川(チュンランチョン)の堤防道に沿って北上することが確認できる。 さらに安東は、朝鮮時代の1605年、乙巳(ウルサ)年の大洪水時に安東邑城が崩れ、邑城門が流されるほど洪水に脆弱だった。 安東が洪水被害から解放されたのは、1976年の安東ダムの築造後だ。
急回転が難しい鉄道の特性上、安東駅から90度に方向を曲がって栄州に北上するためには、民家が密集している安東邑城を通らなければならない。 利害関係が複雑に絡んでいる都心のど真ん中に線路を開設するのは、今も頭の痛いことだ。 安東邑城の昔の地図を確認してみると、中央線の線路は民家被害を最小化するため、安東邑城南門の外の安東駅から東門の外に出た臨清閣の前を通る路線を確定したことが確認できる。 安東駅と林青閣はわずか1キロしか離れていないため、線路が避けるにはほど近い。
中央線敷設の際、安東駅を経由して洛東江(ナクトンガン)を横断する洛東江鉄橋が架けられたのも安東駅の重要性を傍証している。 安東洛東江(アンドン·ナクトンガン)鉄橋は、中央線敷設時の1938年に竣工した。 1934年に竣工した安東橋(人道橋)と並んで建設された。 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 鉄道敷設の際、陸上工事に比べて費用が多くかかり、空気が長くかかる橋梁敷設を避けようとしたことは珍しくなかった。 湖南(ホナム)線を敷設する際、大田(テジョン)を分岐点に決めた理由は、錦江(クムガン)橋梁建設にかかる建設費用の増加と工期の遅延を防ぐためだった。 大田から分岐する場合、既存の京釜線の橋梁をそのまま活用することができた。 橋梁を架けたということは、それだけ重要度が大きかったという証拠だ。
民族の精気を断ち切るために、臨清閣の前に線路を敷いたということは、時期的にも合致しない。 1913年6月、臨清閣の堂主だった李相龍が臨清閣を日本人の岡間房次郎に売り渡したことは、2015年に初めて発見された売買契約書により確認された。 日本人の手に渡った臨清閣は、売られてから2ヵ月後、別の故·李氏一家に再び買収されたが、すでに李相龍先生の手を離れた状態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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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下、記事の該当部分(原文)を引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개
유홍준 교수의 지적처럼, 임청각은 조선시대 민간 주택의 규모 상한선인 99칸 주택이다. 일제 때 집 앞으로 중앙선 단선철로가 개설되면서 99칸의 가옥 중 30칸 정도를 철로 개설을 위해 수용당해 지금은 70칸 정도만 남아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임청각이 상하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의 생가란 점과 맞물려 "일제가 민족정기 훼손을 위해 고의적으로 집 앞으로 철길을 냈다"는 설이 마치 정설처럼 돼버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언급한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다"는 말에는 이런 시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하지만 1942년 중앙선 개통보다 10여년 앞서 들어선 안동역의 위치와 인근 지역의 등고선이 표시된 지형도를 확인해 보면 중앙선 철길은 영남산을 등지고 낙동강가에 있는 임청각 경유가 불가피했다는 지적이다. 소위 '민족정기 훼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5번 국도가 놓여진 코스를 따라 안동 남후면에서 안동대교를 건너 북후면을 지나면 영주로 접근하는 이동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경우 당시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고을이자 경북선 철도의 종점인 안동역을 경유하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안동에 처음 철마(鐵馬)가 들어온 것은 중앙선 개통 10여년 전인 1931년 경북선 점촌(문경)~안동 구간 개통과 함께다. 안동은 조선 때만 해도 '안동대도호부(大都護府)'로 불리며 권문세족들이 많이 살던 큰 고을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이미 경부선 철로가 지나가는 경북 김천에서 상주~점촌(문경)~예천~안동을 연결하는 철로를 개설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조선철도(조철)'라는 사설철도(私鐵)회사는 철도부설 면허를 획득해, 조선총독부가 1913년 이미 고시한 노선에 따라 118㎞의 경북선 철로를 놓았다. 안동읍성(邑城)의 남문 밖에 '경북안동역'이란 이름의 철도역을 개설했다. 안동대도호부가 있던 지금의 안동 시내 웅부공원(옛 안동군청 터)에서 직선으로 300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 철도역이었다. 굳이 '안동역' 앞에 '경북'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만철(滿鐵·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 이미 운영 중이던 '안동역'(지금의 중국 단둥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중앙선 철로가 임청각 앞을 지나게 된 것은 안동에 철도가 들어온 지 10여년이 지난 1942년이다. 후일 만철 총재를 지낸 조선총독부 철도국장 오무라 다쿠이치(大村卓一)가 입안한 '조선철도 12개년 계획'에 따라 경부선·경의선에 이은 제2 한반도 종관(縱貫)철도 계획을 세우면서다. 이 같은 계획에 따라 1935년 경북 경주에서 영천~의성~안동~영주~제천~원주~양평을 거쳐 청량리(동경성역)에 이르는 노선이 확정됐다. 이듬해인 1936년 착공한 중앙선은 1942년 '경경선(京慶線)'이란 이름으로 개통됐다. 경성과 경주를 잇는다는 뜻이다.
당시 중앙선 철로를 개설할 때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물자가 부족할 때다. 기존 철로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수요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경북 북부 최대 도시이자, 당시만 해도 경북선의 종점이었던 안동역 경유는 당연했다. 지금은 중앙선·경북선·영동선 등 3개 철로가 교차하는 영주역이 경북 북부 철도교통의 중심이지만, 당시만 해도 안동역이 철도 교통 요지였다. 경북선의 종점이 안동역에서 영주역으로 변경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66년 경북선과 영동선을 영주에서 직결시키면서다. 지금 영주에 있는 한국철도공사 경북본부의 전신인 철도국은 1964년까지만 해도 안동역에 있었다.
이미 개설된 안동역을 기점으로 철길이 영주로 북상할 경우 낙동강 제방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안동 뒷산인 영남산 계곡을 따라 영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하천 제방 위에 철길을 부설하는 것은 일제 때 흔히 쓴 방법이다. 철로개설과 토지수용에 따른 민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철도개설과 함께 하천 제방을 보강해 여름철 홍수에 대비할 수 있는 여러 장점이 있다. 경부선도 밀양강과 낙동강 제방을 따라 부산으로 간다. 서울에서도 경원선(현 경의중앙선에 편입) 철로가 한양도성을 피해 한강과 중랑천 제방길을 따라 북상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안동은 조선시대 때인 1605년 을사년 대홍수 때 안동읍성이 무너져내리고 읍성문이 떠내려갈 정도로 홍수에 취약했다. 안동이 홍수피해로부터 해방된 것은 1976년 안동댐 축조 후다.
급회전이 힘든 철도의 특성상 안동역에서 90도로 방향을 꺾어 영주로 북상하려면 민가가 밀집한 안동읍성을 지나가야 한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도심 한복판으로 철로를 개설하는 것은 지금도 골치 아픈 부분이다. 안동읍성의 옛 지도를 확인해 보면 중앙선 철길은 민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안동읍성 남문 밖 안동역에서 동문 밖으로 난 임청각 앞으로 지나가는 노선을 확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역과 임청각은 불과 1㎞ 거리로 철로가 피해가기에 지나치게 가깝다.
중앙선 부설 시 안동역을 경유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낙동강철교가 놓인 것도 안동역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안동 낙동강철교는 중앙선 부설 때인 1938년 준공됐다. 앞서 1934년 준공된 안동교(인도교)와 나란히 놓였다.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 때 육상공사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고 공기가 오래 걸리는 교량 부설을 피하려 한 일은 흔했다. 호남선을 부설할 때 대전을 분기점으로 정한 까닭은 금강교량 건설에 드는 건설비용 증가와 공기지연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전서 분기할 경우 기존 경부선 교량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교량을 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도가 컸다는 방증이다.
민족정기를 끊으려 임청각 앞으로 철길을 놓았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부합하지 않는다. 임청각 당주(堂主)였던 이상룡 선생이 1913년 6월 임청각을 일본인 오카마 후사지로(小鎌房次郞)에게 매도한 것은 2015년 처음 발견된 매매계약서를 통해 확인됐다. 일본인 손에 넘어간 임청각은 팔린 지 두 달 만에 다른 고성 이씨 일가에 재인수됐지만 이미 이상룡 선생의 손을 떠난 상태였다.
이상룡 선생이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은 1911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것은 1925년부터 1926년까지다. 중앙선 노선계획을 확정한 1935년보다 3년 전인 1932년 이상룡 선생은 이미 사망한 터였다. 게다가 중앙선 착공 당시는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잇단 의거 이후 일제가 불온한 조선인으로 부른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이뤄지면서 독립운동은 사실상 와해상태에 있었다.
민족정기 훼손 주장이 맞다면 왜 일제가 뒤늦게서야 민족정기를 끊으려 나섰는지가 먼저 규명돼야 한다. 중앙선이 개설된 1930~1940년대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유림(儒林)을 중심으로 철도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보였던 구(舊)한말과 달리 철도의 중요성에 이미 눈뜬 시기다. 한때 번성했던 상주, 공주, 청주 등 대고을이 간선철도 노선에서 비껴가면서 몰락한 반면, 허허벌판이었던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들어오면서 충남도청까지 옮겨올 정도로 급부상했다. 전국 각지에서 지역 유지들과 일본인 거류민을 중심으로 철도개설 청원이 오히려 활발했을 때다.
결국 중앙선 부설과 함게 임청각 일부가 수용돼 헐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민족정기를 끊으려 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여러 정황을 따져봤을 때 당시 상황에서 중앙선을 부설하면서 안동역에서 1㎞ 떨어진 낙동강변의 임청각을 경유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오히려 안동 관내를 통과하는 중앙선 철길 옆에 남아 있는 법흥동 칠층전탑, 안동역 주차장의 운흥동 오층전탑과 같이 철도부설에 따른 문화유산 파괴를 최소화하려는 흔적들이 여럿 있다. 임청각을 민족정기 훼손과 연관해 보는 것은 일제 때 벌어진 모든 일을 선악(善惡) 구도 속에서 바라보는 과도한 피해망상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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